생활의 단면
목소리 , 성당언니, 북촌방향
봄과봄
2011. 10. 26. 02:38
너 목소리가 바꼈다.
-그래?
O분홍이 아니라 O파랑 아냐?
-뭐, 늙어서 그런 거겠지..
대수롭지 않은 듯 대꾸했지만 목소리가 많이 변했다는걸 나도 부쩍 느낀다.
평소에 일정한 톤으로 조율한 목소리를 사용하다보니 조금씩 조금씩 계속 변해왔나 보다.
근데 이상한 건 지금의 목소리가 진짜 내 목소리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
일요일에는 과거 수학능력시험을 보았었던 문일여고(오래 전 MBC에서 방영되었던 청소년드라마 '나'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그땐 참 TV를 많이 봤었는데...)를 성당언니와 찾았었다. 문일여고 교정은 관리가 잘 되어있었고 벤치도 아주 깨끗했다.
낙엽들이 근사하게 여기 저기 흩어있었는데 아직은 북슬북슬해 보일 정도로 잎이 무성한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교 중앙 현관 쪽에는 A4용지에 출력된 수시 합격자 명단이 몇 개 붙어있었다. 인천에서 꽤 명문축에 속하는 고교에서 2년째 근무하고 있는 언니는 근무환경이 너무 각박하여 이번 해를 끝으로 그 쪽 생활을 접고 중학교로 가고 싶다 했다. 언니에게 끝없는 경쟁지옥인 고등학교와 아이들의 생각없는 이기심 따위에 대해 전해들었다. 그 전에 근무했던 곳은 여고(여기도 명문)였는데 현재 있는 남고쪽이 더 힘에 부친듯 하다. 시커멓고 커다란 남자놈들이 우글거리는 교실을 잠시 떠올려보니 not good 이란 말이 자동으로 생각풍선 속에 새겨졌다. 나는 낮에 남자친구의 옷을 골라주러 서울에 갔었던 얘기와 나의 근황등에 대해 이야기 했다. 언니의 남자친구 얘기도 들었다. 여섯 시가 조금 넘자 어두워지고 쌀쌀해져서 옷깃을 여미며 학교를 빠져나왔다. 길가에 처음보는 구제의류점이 있었는데 들어가서 한참동안이나 구경을 했다. 언니가 옷가격을 알고 싶다며 빈 가게의 주인을 역시 한참동안이나 기다렸지만, 우리의 기척을 분명히 느꼈을 주인은 아무리 기다려도 밖(가게와 집이 붙어있는 형태의 옷가게였다.)으로 나오지 않았다.
언니가 사준 고구마라떼를 아주 맛있게 마셨다. 거의 5개월 가량 우유를 끊다시피 하고 살았는데, 겨울이 가까워지니 다시 찾게 된다. 언니가 성당에 가자고 계속해서 권유했지만 다른 사람들과 마주치기 싫다는 이유로 가지 않았다. 그날은 누군가와 인사조차 나눌 힘이 없었다. 요새는 매일미사 앱을 훑어보는 걸로 미사 참석를 대신한다. 내게도 정통 가톨릭 소녀시절이 있었던지 가물거린다.
아직 '오직 그대만'은 보지 못했고, 지지난 주 일요일에 nih와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북촌방향'을 보았다.그날 기분이 아주 흙탕물같아서 '로라이즈'에 가볼까 했는데, 동행인 nih가 내키지 않아해서 영화를 보게 되었다. 영화 시작 2시간 전에 연락했으나 nih는 늦었다. 어느정도는 예상한 일이었다. 예매해둔 nih 몫의 티켓을 수표하는 아가씨에게 맡기고 좌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 기분을 풀어주려 나온 사람이니 그냥 그려려니 했다. 주목할 만한 미술과 조명은 그닥 없었고(하나 꼽아보자면, 클로즈업된 북악산 장면 정도 되겠다. 이발소 그림을 연상시키는 나른한 북악산이 화면에 몇 초간 잡히다가 난생처음 줌아웃을 해봤어요라는 식의 드득거리는 줌아웃이 이어지는 장면_ 나는 나름 신선하게 느껴졌으나 요새 영화에서 자주 쓰이는 카메라 웍이라는 nih의 말에 약간 뻘쭘했다.) 흑백영화라는 점이 좋았다. 전형적인 홍상수의 플롯이었으나 한가지 의구심이 생기는 인물이 있었다. 김상중. 이건 마초도 아니고 문성근식의 날카로운 곤조남도 아닌, 듣도보도 못한 뭉적지근한 중년의 훈남이다. 그 덕분에 모지리과에 속하는 남자주인공과 아름다운 육체를 견비한 여자들의 실소를 잣는 변주에도 불편함이 많이 덜어지는 것은 사실이다만, 영화 속 김상중은 지금까지의 홍상수의 남자들의 범주에서 약간은 동떨어진 인물이다. 중간에 오버를 하는 씬이 있긴 하지만, 약하다. 그렇다고 웃기지도 않고. 아무리 주변인물이라지만 훈남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고 그런 놈이다 라는 암시조차 없다는 것은 좀 신기하다.실망감을 전혀 남기지 않는 남자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