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의 나라는 함정 -임경선-
경향신문에 실렸던 '임경선'의 강연
['있는 그대로의 나'라는 함정]
강연에서 꼭 받는 질문, 아니 하소연이 있는데요 "사랑하면 상처받을까봐 두렵다. 나 좋다는 사람은 싫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한테 관심이 없다. 그렇다고 연애를 안 하고 평생 혼자 살자니 그렇고, 눈 낮추고 주변을 둘러봐도 멀쩡한 사람은 다 기혼이다. 대체 괜찮은 남자들은 왜 없냐? 어디 가서 찾아야 하냐!"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화를 막 내세요 (웃음) 저는 거꾸로 여쭙고 싶어요.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누가 나를 사랑해주길 바라기 전에 당신은 스스로를 사랑하냐고,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냐고. 그러면 또 고개를 갸우뚱, 우물쭈물 '잘 모르겠다'고 하세요. 나도 나를 모르는데 어쨋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나보다 더 이해하고 사랑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는 건 아닌지요. 그리고 우리는 어쩌면 '있는 그대로의 나'라는 명제를 너무 미화하는 건 아닐까요.
가령, 요즘 나오는 감성에세이들을 보면 "너는 하찮은 사람이 아니야" "넌 사실은 좋은 점을 많이 가진 매력적인 사람이야"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해줘"하고 위로하잖아요. 분명 인생 어느 시점에선 이런 말들이 위로가 됐을 테죠.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자는 말은 정말로 최선을 다했는데도 일이 잘 안 풀릴 때, 잠시 나를 위로하는 용도로 쓴다면 모를까, 언제부턴가 이 말이 아무 것도 안 하려는 스스로에 대한 변명으로 이용되는 것 같아요. "이게 나야, 어쩔래?" "난 이런저런 상처가 있어서 지금 이럴 수 밖에 없는 거야"라면서 지금 나의 지질한 점, 못난 점을 합리화하는 데 쓰고 있진 않은지요.
이렇게 사랑에 있어서 자발성, 능동성이 발휘되지 않으면 대신 자존심이나 자의식이 작용합니다. 저는 자존심 내세우는 건 모든 사랑하는 관계에서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자존심 내세우는 관계 자체가 의미가 없잖아요. 대체로 이런 불필요한 모습들을 보이는데요.
첫 번째, 자기는 껍데기에서 한걸음도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으면서 내심 누군가가 껍데기를 깨고 들어와 주길 바랍니다. 그런데 또 막상 깨고 들어오려고 하는 사람을 보면, 왜 하필 너야 라며 화내죠.(웃음)
두 번째, 자신의 문제를 상대에게 투영하거나 내가 채우지 못한 결핍을 대신 채워줄 상대를 기다립니다. 내가 나에 대해서 싫어하는 점을 상대에게서 발견하면 못 견디고 고치라고 강요하기도 하죠.
세 번째, 상처받기 전에 먼저 상처를 줍니다. 조금 불안한 기미가 보이면 그 무엇보다도 내가 버림받을 거라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어서 내가 먼저 마음의 문을 닫습니다. 내가 차이는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앞서면 관계는 기승전결이 없어집니다. 제대로 시작하고 제대로 끝나본 적도 없이 그저 연애의 단맛만 맛보며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합니다. 그렇게 늘 관계에 깊숙이 발을 넣기 보다 항상 여차하면 도망갈 준비가 되어 있는 거죠.
'있는 그대로의 나'가 매력적일 때는 '있는 그대로의 너'를 사랑하고 싶어지는 경우는 딱 한가지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넘어서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일 때죠. 자존감은 '나를 사랑하자'같은 자기암시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남들과 비교해서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요즘은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좀 거창하게 취급받게 되었는데, 그것은 다른 아닌 나 자신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있는 그대로 나를 직시하고 주제파악을 한다는 건데 주제파악이라고 해서 자기비하가 아니라, 나의 좋은 점과 부족한 점을 직시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경계를 알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좀 더 잘하고자 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죠. 타고난 것이나 주변 환경과 상관없이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노력을 꾸준히 해나가는 것, 일상 속의 꾸준한 성실함이 자존감을 만들어나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기본적인 삶의 태도죠. 저는 이런 성실한 자존감이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냐면 나의 불완전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도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애쓸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랑하는 상대의 결핍이나 불완전함을 이해할 포용력을 가지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