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에 먹히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문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미움 뒤에 오는
허탈함은
우리의 시간을 지워버리곤 했지
긴 잠은 몸에 해로워.
조금 더 깊숙히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봤자 죽음같은 것 가까이에 가보지도 못했지
그 지리멸렬함을 어떻게 잊겠어
숨통이 조여오는 밤
일용할 양식이라도 된 듯 일정량의 분노는 하루도 빠짐없이 배달되었고
분노의 화학작용.
그 뒤에 오는 그림자를 뒤집어 쓰고 머리 꼭대기까지 끌어올렸지
이불 바깥은 더 무서우니까.
두더지들만이 베개 위의 나를 물끄러미 쳐다봐주던 밤
그래도 좋았지
두더지들이 있어주었으니
외롭지는 않았어
외로움이 사치라는 걸 알았을 때
비로소 지독한 사치에 빠지게 된다지만
난 계속 가난했고
두더지들은 조용하고 다정하게 다가와주었지
우리는 같은 언어를 쓰지는 않았지만 얘기가 잘 통했어
아무리 상황이 최악이라도 옆에 친구가 있으면
그럭저럭 버틸만 하잖아?
그 때 나는 내 자신이 죽어있는 것과 다름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니 끝없는 단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을 뿐.
단죄의 저울은 가장 높고 깊숙한 방에 숨어 있어, 모든 사물이 유령처럼 떠 다니던 그 시절
여기저기 가파른 계단을 오르다 열었던 방들에서는 저울을 찾아낼 수 없었고......
그래, 필요한 건 이불 뿐이었는지도 모르지
퇴근 후 온 몸에 전원을 내리고
어둠을 온 몸에 두르고 그대로.
이해와 화해가 필요했던 그 때
매일의 괴로움이 나를 희롱하던 그 때
두더지들은 내 주위로 몰려들었고
그들은 내가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듯
자기들도 얼굴은 파묻고 땅 위로는 동근 머리통들만 보여주었지.
오, 두더지들, 친구여
지금은 어디로 갔는가
그땐 너희가 나의 반려인줄 알았으나
지금은 그 사랑스러운 모습이 기억 속에만 있구나
언제고 기억에서 뛰쳐나와 내 머리맡을 수놓아줄 것 같은 너희 두더지들
그립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