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 을 읽고 있다. 다닥다닥 지면을 메우고 있는 고통스런 풍경들을 읽는게 힘에 부쳐서 그만 내팽개쳐 버리고 싶은데 4월 독서모임 책이라서 그럴 수도 없다. 그것만 아니면 소피한테 놀러가서 희희낙락하고 있을텐데, 솔직히 짜증도 난다. 작가는 투쟁하는 인간의 숭고함을 기리고 독려하기 위해 책을 썼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지만 나의 좁아터진 정신세계는 고통의 텍스쳐만을 쏙쏙 삼키고 있는 실정이라 스트레스가 상당하다. 다행히 몰입을 저지하는 무의식의 작용으로 읽기 불편한 부분은 빨리 스킵하고 있지만 그러면 뭘해. 끝까지 보나마나 이 책은 고통으로 누벼진 책인 걸. 투쟁하는 인간의 위대함을 느끼기도 전에 기가 다 빠지고마는 소시민은 이 책을 진정 미친 인내심으로 독파해야 해. 라고 투덜거리지만 이왕 발제까지 하게 되었는데 대충 읽을 순 없음.
내가 별 고민없이 사는 브루주아였으면 이 책을 나름 현학적으로 음미하면서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 잘 안 읽히는 책을 붙잡고 있으려니 잡념들만 무성해져. 그래도 지지않고 끝까지 읽을 것.
오늘의 생산관계는 완결을 가로막고 있다. 사람들은 열려 있는 방향으로 일을 해나간다. 시작과 끝이 있는 완결의 형식은사라져버렸다.
자아의 계속성, 자아의 운동이 완결되어 있지 않고 완결될 수 없다는 사실은 나르시시즘의 본질적 특징이다.세네트에 따르면 완성을 통해 자아와 무관하게 존속하며 자아를 약화시킬 수 있는 어떤 객관화할 수 있는 형태가 생겨나기 때문에, 나르시스적 개인은 의도적으로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거나 뭔가 완결하기를 회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다.
객관적으로 유효한, 최종적으로 완성된 형식이불가능하다는 사회적 조건이 주체를 자기 자신의 나르시스적 반복으로 몰아가고 있고, 그런 까닭에 주체는 하나의 형태, 안정적인 자아상, 확고한 성격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즉 어떤 목표를 달성했다는 느낌은 자아 감정의 고양을 위해 의식적으로 '회피'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목표를 달성했다는 느낌 자체가 결코 찾아오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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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에 따르면 멜랑콜리란 나르시시즘적인 동일시를 통해 자아의 일부로 내면화된 타자가 자아에 대해 파괴적 작용을 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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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은 아얘 타자의 차원이 개입되어 있지 않다. 소진은 자주 우울증으로 귀결되거나 이때 우울증을 유발하는 원인으로는 과도한 긴장과 과부하로 파괴적 특성까지 나타내는 과잉 자기 관계를 들 수 있는 것이다. 탈진과 우울 상태에 빠진 성과주체는 말하자면 자기 자신에 의해 소모되어버리는 셈이다. 그는 자기 자신으로 인해, 자신과의 전쟁으로 인해 지치고 탈진해버린다.
그는 자신에게서 걸어 나와 바깥에 머물며 타자와 세계에 자신을 맡길 줄은 전혀 모른 채 그저 자기 속으로 이를 악물 따름이다. 하지만 그 결과로 남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속이 텅 비어버린 공허한 자아뿐이다. 주체는 점점 더 빨리 돌아가는 쳇바퀴 속에서 마모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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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한 선택의 자유를 누리는 후기근대의 성과주체는 강력한 유대의 능력을 잃어버린다. 우울증은 모든 유대를 끊어버린다. 슬픔은 대상과의 강력한 리비도적 유대관계에서 나오며 무엇보다도 그 점에서 우울증과 구별된다. 반면 우울증은 대상이 없고 따라서 지향점도 없다. 우울증은 멜랑콜리와도 중요한 차이가 있다. 멜랑콜리는 어떤 상실의 체험 뒤에 온다. 따라서 멜랑콜리는 그나마 어떤 관계 속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부재하는 자와의 부정적 관계가 멜랑콜리의 조건인 것이다.
하지만 우울증은 모든 관계와 유대에서 잘려나간 상태이다. 우울증에는 아무런 중력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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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슈미트에 따르면 우울증은 종결시키는 결단력의부재라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특징적인 현상이다. 결단의 일도양단적인 폭력은 질질 끄는 갈등이 생겨날 가능성 자체를 막아버린다. 그렇게 본다면,우울증은 "갈등이라는 준거가 상실"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완결된 형식을 만들어내고 보상 기관으로 기능하는 객관적인 결정의 심급이사라졌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흡수하는 것처럼 보이는 자본의 전일적 지배는 현재로서는 합의적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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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 인해 경쟁은 절대적 경쟁으로 첨예화된다. 즉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경쟁하면서 끝없이 자기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강박,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추월해야 한다는 파괴적 강박 속에 빠지는 것이다. 자유를 가장한 이러한 자기 강요는 결국 파국으로 끝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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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근대의 성과주체는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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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가 일정한 생산수준에 이르면, 자기 착취는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능률적으로 된다. 그것은 자기 착취가 자유의 감정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성과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성과주체는 완전히 타버릴Burntout 때까지 자기를 착취하다. 여기서 자학성이 생겨나며 그것은 드물지 않게 자살로까지 치닫는다. 프로젝트는 성과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날리는 탄환Projektil임이 드러난다.
이상 자아에 비하면 현실의 자아는 온통 자책할 거리밖에 없는 낙오자로 나타난다. 자아는 자기 자신과 전쟁을 치른다. 모든 외적 강제에서 해방되었다고 믿는 긍정성의 사회는 파괴적 자기 강제의 덫에 걸려든다. 21세기의 대표 질병인 소진증후군이나 우울증 같은 심리 질환들은 모든 자학적 특징을 나타낸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폭력을 가하고 자기를 착취한다. 타자에게서 오는 폭력이 사라지는 대신 스스로 만들어낸 폭력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러한 폭력은 희생자가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더 치명적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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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그렇게 그는 자신을 착취한다. 자기 착취는 기만적인 자유의 느낌을 동반하는 한에서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기도 한다. 착취는 지배 없이 관철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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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경제는 생존을 절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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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감싸던 서사성은 완전히 벗겨졌고 생동성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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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사회는 그 내적 논리에 따라 도핑사회로 발전한다. 단순한 생명 기능으로 환원된 삶은 무조건 건강하게 유지해야만 하는 삶이다. 건강은 새로운 여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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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생명은 완전히 죽지 않은 자들의 생명과 비슷하다. 그들은 죽을 수 있기에는 너무 생생하고 살 수 있기에는 너무 죽어 있는 것이다.
- 한병철의 책 '피로사회' 중 [우울 사회] 편에서-
화요일에는 말랑말랑한 소피의 세계를 눈이 빠지도록 읽었는데, 오늘은 뜬금없이 미추어버릴 것 같은 소식을 듣게 되어서 퇴근길에 사온 바나나에몽, 녹차연인, 커피우유를 신들린 듯 먹어치워버렸고. 대략 정신을 추스른 다음에는 Wham의 edge of heaven으로 뇌를 도핑상태로 만든 후 '피로사회'를 집어 들었다. 거의 광란의 상태로 글자들을 훑어내려가다가 심금을 울리는 구절들을 옮겨적어봤는데 양이 꽤... 월요일부터 이상한 의기소침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오늘을 기점으로 일터에서 스트레스가 비처럼 내려와...게다가 연말정산 환불금을 아직 안 받은 줄 알고 있었는데 벌써 10여일도 더 전에 지급받았었던 것... 근데 통장의 잔고는 또 왜 그 모양 그 꼴... 저 멀리서 슬픔이..슬픔이 밀려오고 있다아... 2~3월엔 영화 한 편, 옷 한 벌 산적이 없는데, 왜 통장은 비명을 지르고 있냐고~! 간식비랑 책값을 줄여야 하나?.. 아, 몰라. 쇠와 포도주의 처방전 '회전목마'나 들으며 환락에 젖어들테다 . 일단은 잠시라도 우울에서 도망가야지. 샘아저씨 생긴 건 밤낮없이 목젖에 술을 콸콸 쏟아붓는 술고래 신부같은데 음악은 포도주처럼 풍미가 좋단 말이야. 이 앨범은 자켓도 죽이네. 저 개라면 지옥에서도 기죽지 않고 컹컹 짖어댈것 같아. 워낙 개를 좋아해서인지 내 눈엔 저 개도 러블리해 보여. 순수하고 광적이고 사나워보이지도 않는단 말이지. 귤노란 배경색도 ,시큼한 안광도, 폭발직전의 몸뚱이도 아주 마음에 들어.
흰 토끼에 관해선 아마도 토끼를 전체 우주와 비교하는 편이 더 좋을 것 같구나.
이 지구에 사는 우리들은 토끼 가죽 아래 깊숙한 곳에서 우글거리는 벌레들이라고 할까!
하지만 철학자는 가느다란 털을 붙잡고, 위대한 마법사를 직접 두 눈으로 보기 위해 마냥 위로 기어오르려고 하는 사람들이란다.
-책 [소피의 세계] '마술사의 모자' 중에서 세계를 마술사의 모자 속에서 튀어나온 토끼로 비유한 구절이다.
아아아....토오끼라니......
저 정도 비유라면 헤어샵에서 패션잡지를 넘기던
소녀들도 귀를 쫑긋 세우겠다.
나님은 책장을 넘기다가 눈에 하트 문신이 새겨지는 줄 알았다능.
시집의 전체적인 이미지가
상실의 터널에서 마악 빠져나와 의식이 희미한 한 남자가
처음 눈부신 흰 빛을 맞았을 때 쏟아내는
(정확히 말하자면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창백하고 신실한 언어들의 일광욕
같다
시간을 쌓는다는 것,
기억을 감아올린 다는 것,
덧없고 덧없다
라고 말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말문을 막히게 했던 순간이란
영원하고 영원하다
고 역설한다
기억은 순간의 조합이고
순간은 망상과 인상이 겹쳐서 그려지는 한 장의 사진이고.
감정이란 언제든지 저장이 가능하다
재를 보고서
불길이 스쳤던 피부를 쓸어내리는 자는 없다
아주 약간의 온기와 망상만으로
그날은 재생되는 것
무의식의 코끼리는 묵묵히 모든 말과 정지화면들을 씹어삼키고
되새김질하고 배설한다
이별의 쓸쓸함에 저항하던 육체는 저물지만
의식의 아래에서 쏘아 올리는 코끼리똥은 흩어지지 않고
원래부터 있었던 곳, 바로 그 자리로 낙하한다
저무는 인생을 노려볼 힘조차 사라져 서글픈 침대에 몸을 던질 때
코끼리똥은 여전히
떨어진다 위로
Cowboy Junkies의 Isn't it a pity
무게가 느껴지는 아코디언 소리에 호소력 짙은 저음의 보컬이 공기 중에 고리처럼 맺어져 편안한 파동을 그려준다.
Margo의 근사한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좋다.
(부엉씨는 카우보이 정키스가 가스펠같다고 투덜대지만, 여자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음악을 한다고 그들은!)
♪ 중도하차 방지법
A. 예술창작을 하는 사람들과 교제하며 진행 중인 작업을 함께 나누는 시간을 자주 갖는다.
B. 목표를 뉴욕현대미술관으로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경험교환에 대해 생각하는 법을 배우자.
♪예술창조와 감상은 끊임없이 많은 에너지의 투자를 필요로 한다. 나약해지는 순간, 천재성의 신화는 예술가로 하여금 예술 창조를 포기하게 하는, 또한 감상자에게 이해하고자하는 노력을 그만두게 하는 구실이 된다.
♪꿈, 불확실성, 그리고 재료에 대한 지식은 모든 예술가들이 인정하고 또 그로부터 배워야만하는 불가피한 특성이다. 꿈은 언제나 실천에 선행하고, 재료에 대한 지식은 현실과의 접촉을 이야기해 주며, 불확실성은 하나의 미덕이다.
♪오직 (시간이 있는) 창작자만이 작품창작과정에서의 일정한 습관이나 격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감상자들은 (종종 교사들도) 예술작품 창작 과정의 개인적인 세부사항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아마 완성된 작품만을 봐서는 그 세부적인 것들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헤밍웨이는 타자기를 상점 계산대 높이에 올려놓고 서서 글을 썼다고 한다. 그가 서있지 않는다는 것은 곧 그가 글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그 괴상한 습관은 그의 글을 통해서는 알 수 없지만, 그가 그 습관을 버렸더라면 그의 소설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해, 예술창작에서 가장 힘든 부분은 자신의 작품이 창작되는 방식으로 생활해야 한다는 점이며,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유용한 생활방식들을 찾아내는 것을 말한다. 예술작품은 생산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생활에 드러나는 표현이다.
♪인생과 예술은 일단 뒤엉키면 쉽게 떼어내기 힘든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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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화요일에 찾았던 한남동의 '테이크아웃 드로잉'에서 읽고 메모하다.
그때 나무에 죽 연결된 긴 전선에 매달린 램프들에 불이 밝혀졌다. 아직 날이 어두워지지는 않고 해가 막 저물기 시작하려는 무렵이었기 때문에, 그 램프들은 밝은 빛을 퍼뜨리지는 못하고, 마치 움직이지 않는 커다란 눈물 방울들처럼 잿빛의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닦아낼 수 없는 그리고 흘러내리지도 못하는 하얀색 눈물 방울들처럼. 어떤 갑작스럽고도 설명할 수 없는 무력감이 덮쳐와 모두를 사로잡았다. 야로슬라브는 다시 한번 (이번에는 거의 애원하며) 이제 정말 더 견딜 수가 없으며 들판으로 나가 들장미 덤블 곁에서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연주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낙담한 몸짓을 하며 가슴에 바이올린을 대고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우리는 청중은 신경쓰지 않고 처음보다 더 몰두하여 연주했다. 정원의 분위기가 점점 더 무례하고 거칠어질수록, 아무도 안중에 없이 소란스럽게 떠들어 우리를 마치 버려진 외딴 섬처럼 만들수록, 우울이 우리를 점점 더 죄어올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 속으로 더 몰입해 들어가 다른 이들은 모두 잊어버리고 우리 자신을 위하여 연주를 했다. 음악은 하나의 아늑한 공간이었고, 그 공간은 소란스런 취객들 가운데 둘러싸인 우리가 마치 차디찬 물 속에 있는 유리집 같은 것 속에 들어앉아 있는 듯한 느낌을 가져다 주었다.
밀란쿤데라 '농담' 중..
위 글은 '농담'의 거의 끝부분에 나오는 부분으로, 사소한 농담으로 인해 파란의 세월을 겪어 서른 일곱이 된 루드빅의 독백이라고 볼 수 있는데, 건조함 속에 녹아있는 도취적이고 치기만만한 묘사가 참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특히 램프에 대한 묘사는 쿤데라답지 않게 연하고 물컹한 터치가 느껴져 신선하기까지 함.
(잿빛 허공에 매달려 있는 움직이지 않는 하얀 눈물방울 이라니... 단번에 나를 사로잡을만한 비유다.)
대부분의 쿤데라 소설은 3인칭 시점의 형식으로 전개되고( 1인칭으로 서술되더라도 1부~7부로 이어지는 내용 구성에서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 사건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므로, 등장인물들에게 깊은 감정이입이 쉽지 않은데, 위의 글에서 램프- 악단의 공연으로 이어지는 상황묘사는 정말이지 절묘하게 감상적이라 읽고 또 읽게 된다.
어느 계절을 같이 했었던 지울 수 없는 기억의 그(또는 그녀)와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 스침은 무엇을 의미할까?
책은 삶과 운명이라는 주제 속에 이 물음을 선명하게 새겨 놓았다.
나의 그닥 길지 않은 여정을 되돌아봐도, 이 무슨 얼토당토 않은 인연인가 할 정도로 황당한 사슬로 엮여진 매듭들이 솔찮히 존재한다. 우연이란 도처에 널려 있으니 '뭐, 다 그렇고 그런거지.' 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도 때로는 그 회의적인 생각을 망각해버리고 물음의 수렁에 빠져들고는 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인간의 여정이 블랙코미디 (소설 혹은 영화)라 해도 내 인생만은 굴곡없는 길을 가기를 바라는 바, 힘빼고 대충 살리라... 는 아니고
조용히 부를 축적하는 성장하는 세계가 되어야지.